"야구 우찌됐노?"

1. "야구 우찌됐노?"
부산 사람들은 보통 "오늘 롯데 이겼나?", "롯데 경기 우찌 됐노?"라고 묻지 않고, "야구 이겼나?", "야구 우찌 됐노?"라고 질문을 합니다. 적어도 제 주변은 그렇습니다. 롯데가 곧 야구인 셈입니다.

2. 랑큐·중큐·중랑큐·홍큐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자랄 땐 야구공을 칭하는 방식도 특이했습니다. 서울에서 연식·중경식 공이라고 부른 데 반해 부산에서는 랑큐·중큐·중랑큐·홍큐 등으로 불렀습니다.

3. 유별난 응원 문화.
'아- 주라', '신문지 응원' 등은 부산에서 시작돼 전국의 롯데팬에게 퍼졌습니다. '아- 주라'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80년대 이후, 프로야구 출범 이후에 퍼진 야구 문화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전에는 부산에서도 '아- 주라'를 하지 않았습니다. 원천적으로 봉쇄됐으니까요. 제가 아는 부산 출신의 기자 한 분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 분은 1961년생입니다.

그때(1970년대 아마야구)는 파울 볼이 관중석으로 넘어가면 장내 아나운서가 방송을 했다. '1루츠윽-, 1루측 관중석에- 파울 볼 주운 학새앵- 빨리 공 던져 주세요.' 공이 귀한 시절이라 관중석에 넘어간 파울 볼을 던져 주지 않으면 던져 줄 때까지 경기가 중단됐다. 그래서 누가 공을 잡아 안 주려고 하면 주위에서 '빨리 주라!'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가끔 공을 들고 도망가는 학생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진행요원이 잡으러 다녔다.

그땐 아마 '아- 주라'가 아니라 '마- 주라'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부산 사람들은 '마- 주라' 무슨 뜻인지 아시죠?^^) 암튼 '아-주라'는 파울 볼을 관중이 가져가도 되는 상황,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의 상황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신문지 응원'또한 언제부터 등장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제 느낌으로는 늦게 잡아도 1980년 후반, 1990년대 초반 정도는 된 것 같습니다. 다만 그때는 신문지를 지금처럼 가지런히 자르지 않고 구겨진 채로 흔들었습니다.

5. '사설 응원단장'의 원조.
방송인 유퉁(본명 유순)입니다. 야구엔 별로 관심이 없었던 유퉁은 1986시즌 출범에 맞춰 사직구장 입구에서 심장병 어린이를 위한 모금 행사를 벌였습니다. 이를 보던 관중 하나가 좋은 일 하는데 구장 안에서도 모금을 해보라며 입장권 한 장을 건네줬습니다. 유퉁은 야구장에 들어가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때는 야구를 보는 것보다는 한풀이하러, 화풀이하러 구장을 찾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경기장 질서가 말이 아니었다. 술을 마시고 싸움을 벌이는 관중들이 너무 많았다. 경기가 끝나면 구장 전체가 쓰레기장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싶었다. 학교 다닐 때 응원단장도 해봤고 배우 수업을 하고 있던 때라 직접 응원에 나서 경기장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독지가의 지원을 받아 옷감을 사고 피에로 옷을 손수 만들었다. 사직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응원을 시작하자 경기장 폭력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1987년 연예계로 진출하면서 사직구장을 떠난 유퉁은 이후 경기장 폭력이 심해지자 1989년 '오륙도 응원단'을 조직하고 사직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1989년 5월 5일자 스포츠서울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지난 3월 10일 출범한 이 응원단(단장 유순)은 국내 유일의 자원응원단체로 부산의 상징인 '오륙도' 이름을 붙여 창단 이후 헌신적인 노력을 쏟은 결과 폭력난동사태의 추방은 물론 무질서를 바로 잡아 야구의 명문 고장답게 명예를 회복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유퉁에 이어 사직의 명물로 등장한 '사설 응원단장'이 일명 '살살이'입니다. 화장을 하고 여자 옷을 입은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이 분 요즘도 가끔 TV에 잡히는 것 같던데요. 본명이 백인호라고 들었습니다(틀릴지도 모릅니다).

5.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부산갈매기'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부산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해 전국적인 히트를 치게 된 노래입니다. 1977년 3월 16일자 〈주간스포츠〉의 내용입니다.

춘삼월이 되면 남녘에서 화신花信이란 게 올라온다. 벚꽃이 남쪽에서부터 피기 시작하면 며칠 여유를 두고 북상하며 꽃소식을 알리는 것이다. 조용필의 노래도 영락없이 화신의 북상 코스를 밟아왔다. 노래 제목이 '부산항'이어선지 부산의 다방가에서 주로 퍼지기 시작한 끝에 77년 벽두에 서울로 북상, 이젠 베스트셀러로 랭크되고 있다.(1977년 3월 16일자 〈주간스포츠〉)

조용필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6년 전(1971년)에도 취입했던 곡이었죠. 이번엔 트로트풍(뽕짝조)에다 고고 리듬을 가미한 것이 약간의 신장재개업인 셈이었죠. 부산 친구들이 저에 대한 대접으로 판을 돌리다 보니 덤으로 「부산항」이 돌아갔던가 봐요. 부산에서 부산 노래가 나오니까 시민들에겐 약간의 친근미도 생기고 때마침 조총련 재일동포의 모국방문으로 무드가 조성되어 가사의 내용이 어필했던 모양입니다.(같은 날짜 〈주간스포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전국민의 애창곡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전국민의 가요만이 아니라 역사는 이 노래에 세기의 가요라는 특전도 하사했다. 뉴 밀레니엄을 앞두고 지난 100년을 정리하는 여러 설문조사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등을 제치고 수차례 20세기 최고의 대중가요로 꼽힌 바 있다."고 썼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1979년 4월 당시 세계적인 악단 '폴·모리아'에 의해 연주되어 편곡 앨범이 발매되기도 했지요. 번역된 곡명은 'Please return to Pusan Port'입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프로야구 출범부터 구덕운동장에서 불려진 것 같습니다. 당시는 일본 영향을 많이 받아서 트럼펫 연주로 흘러나오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부산갈매기'는 도대체 언제부터 부산야구장에서 불려졌을까요. 문성재가 '부산갈매기'가 수록된 앨범을 발표한 것은 1982년 하반기입니다. 그러니 대중들에게 이 노래가 인기를 끌게 된 것은 1983년 이후가 아닌가 합니다. 이 무렵 KBS 가요톱텐에서 '부산갈매기' 뮤직비디오를 본 기억이 납니다. 뮤직비디오라 해봐야 태종대에서 '부산갈매기'를 부르는 문성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정도였지만.

가요톱텐은 인기와 순위가 맞지 않는 걸로 유명한 프로그램이었지요. 한창 인기를 끌고 나면 뒤늦게 순위에 오르는 노래가 하나 둘이 아니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문성재는 현재 부산 다대포 부근에서 라이브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부산갈매기가 1983년 하반기 가요톱텐 6위까지 올랐다고 하네요. 그리고 문성재는 이 노래로 이 해 KBS가요대상 후보에도 올랐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부산갈매기'는 1984년 롯데의 첫 우승 때까지는 불려지지 않다가 1986년 홈구장을 사직으로 옮긴 이후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한 듯합니다.

언젠가 사직에 갔을 때 관중들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부르지 않고 '부산갈매기'만 불러 섭섭해 한 기억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부산갈매기에 못지 않게 돌아와요 부산항에도 애착이 갑니다. 두 노래 말고도 사직구장에는 여러 가지 응원가가 시도됐었던 것 같습니다. 공식응원가 '미스터 자이언츠', 강병철과 삼태기의 '야구의 1번지', 윤시내의 '부산 찬가' 등이 생각납니다.

6. 흥분 잘하는 관중.
약간은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한국야구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관중소란 행위가 가장 심했던 곳은 부산이었다. (1987년) 4월 12일 원정팀 해태가 롯데를 6대2로 꺾자 한 취객이 해태 덕아웃으로 난입, 선수들과 치고받는 난투극을 벌였으며 이에 따라 해태선수들은 흥분한 관중들에 포위돼 1시간 이상 경기장을 빠져나가지 못했고 롯데 허구연 코치 등 선수단이 가진 승용차 몇 대가 부서지는 불상사가 빚어졌다. 사직구장의 일부 관중들은 롯데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기를 했을 때 경기장 앞에 진을 치고 성기영成基永 감독을 비롯한 선수단을 성토하거나 유리창 등 기물을 파괴한 사례가 9차례에 달해 롯데구단은 500여만원을 운동장 측에 변상해야 했다.

다른 구장 사정은 모르겠지만 1980년대 중·후반 사직구장에서는 정말 징그럽게 싸움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상대편 응원단과 싸우고, 같은 팀을 응원하는 사람끼리 싸우고, 심지어는 자기 팀의 응원단장이나 상대편 선수하고도 싸웠습니다. 옷도 잘 벗었지요. 혼자 분에 못 이겨 쓰레기통을 메고 그물을 기어오르는 사람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7. 인터벌 긴 투수에 약한 선수들.
1990년대 초·중반 유독 롯데에 강한 모 투수가 있었습니다. 이 투수는 인타벌이 긴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이 투수가 등판하면 경기 시간 세 시간은 기본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습니다. 성질 급한 롯데 선수들은 별로 빠르지도 않은 공에 방망이를 휘두르다가 제 풀에 지쳐 범타로 물러나곤 했지요. 롯데 타자들이 하도 이 투수에 당하니까 제 친구 중의 하나는 "지역색이라는 게 있긴 있는 가보다. 이건 성질 급해서 못치는 거다"라고 했습니다. 그럴 듯하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이 분 지금 어디 계신다고는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다만 현 삼성의 전병호 투수와 비슷한 스타일이었습니다.

8. 좋나? 좋다! 아이탐.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내아이들에게 야구와 축구만큼 재미있는 놀이는 없었습니다. 학교에선 대체로 축구를 했고, 집에 돌아와선 책가방 던져놓고 동네에서 야구를 했습니다. 글러브와 방망이를 갖춘 정식 야구도 많이 했지만 '좋나? 좋다!'로 시작되는 주먹 야구도 꽤 했습니다.
주먹야구는 투수 없이 타자가 고무공이나 테니스공을 주먹 쥔 맨손으로 치는 방식입니다. '주먹 야구'를 부산에서는 '홈런'이라 불렀습니다. 동네마다 명칭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 치기 전에 반드시 '좋나?'라고 해야 했고 '좋다!'라는 대답이 없으면 무효(노·플레이)였습니다. 수비측은 수비 준비가 끝날 때까지 '아이 탐'(타임 요청)을 부를 수 있었지요. 요즘 아이들은 축구는 꽤 하는 것 같은데 야구는 거의 하지 않는 것 같네요.

9. 마-마-마.
전준호가 롯데에 있을 때가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전준호가 1루에 나가면 부산팬들이 매우 즐거워했지요. '사설 응원단장'의 신호에 맞춰 '띠라'고 외치면 뛰어도 그만, 안 뛰어도 그만, 그 자체가 흥겨웠습니다. 그때는 '띠라'는 구호를 외치기 전, 초등학교 운동회 같은 데서 사용하는 딱총을 쏘기도 했습니다. 행여 상대팀 투수가 견제구를 던지면 그때도 난리가 났지요. 현재는 이 '난리'가 '마- 마- 마-'로 조직화됐습니다.

10. 선수에 대한 애정과 의리.
역시 전준호와 관련된 이야깁니다. 제 주변에는 "전준호 팔아먹은 뒤로 야구장 안 간다"는 친구들이 꽤 있습니다. 전준호 이후로 김민재, 마해영, 김대익, 문동환 같은 선수들도 부산을 떠났습니다.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저도 잇단 트레이드 이후부터 근 10년 동안 야구장에 발길을 끊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김명성, 임수혁, 박동희를 떠올릴 때면 마음이 더 무거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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